한강 "흰" 완독 20241126
술술 적당히 깊게 완독했다, 한강 작가님 "흰"! 수필이나 산문시 같기도 한데 내용 쭉 이어지는 개연성, 연결감이 확실하고 소재와 비유가 좋았다.
각 소재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나도 생각을 써 두었다.
- "달떡"
어릴 때 슬픔과 가장 가까워진 경험, 나도 떠올려봤다. 아마 돌봐주시던 조부모님 댁에서 할머니 돌아가시고, 동생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아마 부모님이 집에서 돌보시고, 나 혼자 외조부모님 댁 시골에 맡겨졌을 때. 3살-5살 때쯤인 것 같다.
친척이 날 보러 왔다가 헤어질 때 동전 쥐어주고 새우깡 사러 다녀오라고 하고 택시 불러서 터미널로 떠났던 기억.
손에 뿌듯하게 차는 500원을 쥐고 행복하게 슈퍼에 다녀왔는데 택시 타고 가는 장면을 보고 주저앉아서 울었다.
울면서 생각해보니 지난번 방문 때도 이렇게 속은 것 같아서 또 속은 내가 바보 같았고 혼자 버려진 기분 들었다. 그냥 솔직히 다음에 또 만나자, 갈게, 안녕! 해 주는 쪽이 더 나은 것 같아서 많이 울었다.
오래 울다가 앉아서 오줌까지 쌀 정도로 울었다. 외조부님이 상냥하게 다 울었냐고 물어보고 오줌 치워주신 게 감사하고 부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돌이켜보니 어차피 다음에 시간 나면 또 보러 올 것이 분명하고, 가만히 앉아서 책만 읽고 소심하고 욕심도 별로 없는 아이 보러 오는 건 오히려 힐링이니까 귀여운 애를 못 보고 떠나야만 하는 어른 쪽이 더 손해다.
그리고 타고난 정신력이 대단히 강하진 못한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여기저기서 사랑 주고 돌봐주셨기 때문에 분리불안 없고 손 안 가는 어린이가 되었고, 커서도 혼자 더 잘 지내고 여행도 잘 다니는 사람이 된 것 같다.
- "흰 도시"
: 이거 아마도 폴란드 바르샤바 봉기 아닐까 싶다. 읽는 거 잠시 멈추고 무슨 나라지, 하고 찾아보니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저항하던 반-나치 폴란드 시민 분들 진짜 참혹하고 슬프고 대단히 존경스러웠다.
우리나라도 일제 식민지였을 때 독립 운동가 분들, 독립군 분들이 저렇게 싸웠을까 싶어서 약소국 독립 만세다, 이 나치 놈들아! 싶었다. 국경까지 와서 도와주지 않고 방해만 한 소비에트 연방군도 추잡하고 무도하고.
- "레이스 커튼"
: 오히려 반대가 아닐까? '우리 안에 어떤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이 있어서 인간답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 아니라, 끈적하고 질척하게 혼재되어 있는 속내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흔적을 질질 흘리고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겉이라도 깔끔하게 레이스 커튼을 쳐서 감추는 것. 진짜 끈적 질척하고 더러운 마음이 나의 주변 일상 생활에 넘쳐나오지 않도록, 서로 각각 단속하고 자제하는 게 커튼 아닐까 싶다.
주기적으로 창을 열어서 환기할 때 바람과 햇볕에 더러운 속내가 좀 소독되고 희석되고. 또 환기가 끝나면 다시 창을 닫아둘 때 또 스멀스멀 내 안에 더러운 공기가 차 오르는 걸 커튼을 쳐서 한 겹 단정하게 가리고.
어떻게 보면 우리 안에 있는, 더럽혀지지 않는 흰 것은 흰 레이스 커튼이 아니라 그 커튼을 세탁하고 건조하는 가사노동과 그 의지 자체가 흰 것이니까 작가님 생각과 통하기는 통한다.
아무리 커튼 부지런히 쳐도 먼지 앉고 노래지면 다시 걷어서 세탁, 건조해야 한다. 커튼도 베겟잇도 이불도 흴 수 있는 이유는 시간의 흐름에도 맞서서 보다 쾌적하고 성숙하게 세탁하고 건조하려는 노력 덕분이다.
구조적으로 비인간적인 상황에서는 그 커튼을 생각하고 상기시키는 게 인간 집단의 희망이자 목적이 되는 거다. 흰 커튼을 가지고 창가에 치고 환기할 때 걷고 더러워지면 빨고 말리려는 것 자체.
흰 베겟잇과 이불 등에 눕는 인간으로부터 살비듬이나 땀과 기름이 나오고 공기와 만나서 썩고 냄새나게 더럽혀지는데 그것 또한 꾸준히 세탁하고 햇볕에 널어 말려 다시 깔고 눕는 거다. 인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냄새나고 더러워지지만 그걸 깨끗하게 하는 노력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고 누구나 살아가면서 배우고 다듬어가야 할 인생 자세.
- "하얗게 웃는다"
와 진짜 생각도 못 했다. 나에게 하얗게 웃는다는 건 아주 어린 하얀 강아지가 꼬리치면서 하찮고 무해하고 순하게 쉼없이 치대는 느낌이다. 또는 완전히 긍정 에너지와 순수한 동심으로 가득 찬 어린이가, 너무 밝아서 흰 색으로 눈부신 햇빛처럼 해맑게 웃음을 터뜨리는 것.
그렇게 하얗게 웃는 걸 보면 타락하고 썩은 나로서도 멍하게 행복한 마음이 팡 터지는 것.
작가님 마음에서, 기억에서, 하얗게 웃던 분은 누구시고 어떤 상황이셨을까?
- "반짝임"
: 물이 반짝이는데 물이 생명을 상징해서 인류가 귀금속을 사랑해 온 것은 아닌 것 같다. 빛-어둠의 대치에서 빛의 상징이 깨달음, 지혜, (사이비가 아닌) 종교의 신, 통치 등이니까 그 빛을 상징하는 반짝이는 광물 중 잘 변하지 않고 제일 반짝이는 것들이 수요 높은 귀금속으로 남은 것 아닐까.
우리나라? 동양? 사상에선 검은색이 물을 상징하는 색인 것만 봐도. 빛나는 건 물이 아니라 조명이나 햇빛이고 물이나 보석은 그걸 반사하는 것에 불과하다.
- "빛의 섬"
나도 혼자 그 빛의 섬 같던 무대에서 연주했던 상황이 생각났다. 리허설 했는데도 그렇게까지 아무것도 안 보일 줄 몰라서 당황했고 관객석 목소리 하나하나가 너무 잘 들려서 더 놀랐다. 무대에서 나는 소리가 잘 들리도록 만든 구조라서 관객석에서 나는 소리도 무대에 잘 들리는 걸까.
책을 읽으면서 나에게 흰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제일 높은 도 소리
시작과 출발
들숨
겨냥
세안과 목욕
포만감
사망자 본인에게 자신의 사망 직후
일요일
아침
보드라움
빙판 위 미끄럼 타는 것
수영 충분히 오랫동안 하고 잘 씻고 나올 때
오랫동안 울다가 울음 그치고 나서 멍할 때
뭔가를 물에 불리는 것
아 더 많이 생각했는데 적어두지 않아서 기억이 안 난다. 이미 작가님이 실제로 색감이 흰 것에 대한 책을 잘 써 두셨는데 나에겐 추상적인 개념이나 행위나 소리가 흰 것으로 더 느껴졌다. 그리고 나아가 다른 것들은 어떤 색인지 생각해보게 됐다.
큰 고통이나 폭력이 없기 때문에, 나처럼 과몰입 소심 쫄보 겁쟁이 독자이지만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작품을 원서로 꼭 한 권은 읽고 싶다는 분들께 이 "흰"을 매우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