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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2』까지 다 읽었다.

일단 내 생활에 적용해보려고 하니 『미움받을 용기』 처음에 나오는 '과제 분리'부터 쉽지 않다. 과제를 분리해야 타인을 칭찬하지도 질책하지고 않고 가치 판단하지 않을 수 있을텐데. 그리고 타인을 존재의 차원에서 존경하고 신뢰할 수 있을텐데.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생각하기에 그 사람들이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강요했을 때는 그렇게 마음같이 되지 않아서 괴로웠고, 강요받았을 때는 그렇게 해야 하는데 잘 되지 않는다고 느끼거나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서 괴로웠다.

그래도 내 과제, 바꿀 수 있는 것만을 챙기면서 타인의 과제, 바꿀 수 없는 것을 긍정적으로 포기하면서 홀가분해질 수 있겠다.



온라인에서 내가 좋다고 느낀 게시물에 하트를 누르는 것도 타인을 칭찬해서 인정욕구에 종속되게 하고, 경쟁으로 불안을 느끼게 하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먼저 사랑해 주기만 하는 거니까 내가 가지고 있던 인정욕구로부터 벗어나고, 그 사랑을 되돌려 받길 원하지 않음으로써 내가 바꿀 수도 없고 타인의 과제니까 과제 분리, 타자신뢰일까?

그냥 마음가짐의 문제일까? 과제 분리, 타자신뢰, 공헌감을 느끼려고만 하면 괜찮은 것일까?



2에서는 교사가 된 청년이 학교 문제학생들을 겪는 얘기가 나오는데 철학자는 그 학생들을 야단치고 권위로 짓누르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야단치고 권위로 짓누르는 건 내 마음대로 하기 위한 것이고 상대를 나와 대등하게 보지도, 존경하거나 신뢰하지도 않는 것이라고.

문제 행동하는 5단계? 5가지 이유가 나오는데 그것들 모두가 공동체에서 평범하지 않은 위치로서 소속감을 가지기 위해서라고 보는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을 존재의 차원에서 신뢰하고 존경하고 대등한 존재로서 대하고,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만이 의미있고 모든 선택은 나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고.

공포든 질책이든 칭찬이든 타인으로부터 받아서 인정욕구를 채우는 건 아무 의미가 없으니,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스스로를 수용, 평범해질 용기를 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칭찬받든 질책받든 그런 타인의 평가로, 내 실력과 행위로 인정받으려는 건 경쟁으로 이어지고 내 실력이 없어지면 버림받으니까 무의미한 것.

그리고 그러면 그 때부턴 과제의 분리와 자기수용 시작일 것 같다.

법에 저촉되는 일이면 법에 맡기고, 그렇지 않으면 카운슬러/교육자가 아들러 심리학으로 카운슬링.

과연 이런 게 얼마나 교육 현장에서 통할까 싶은 비관적인 생각이 들어서. 교육 전문가이신 현직 교사 분들을 신뢰하고 존경하는 생각을 해보려고 한다. 배우고 성장할 학생들, 그 학생들을 뒷받침하는 보호자 분들까지도.


약간 소승불교 일상 수행? 과도 닮은 것 같고, 냉철하게 도시적 현대 개인주의 같다가도 결과적으로는 인류 전체 공동체에 공헌한다는 주관적인 감각이 행복이라고 하니까 대승불교 같기도.



『미움받을 용기 2』에서 사랑 (아마도 성인과 성인이 만나 하는 정신적, 육체적 관계)을 말하는 마지막 부분에도 의문이 들었다.

어떤 운명의 상대라는 게 없다, 그건 거절당하기 싫어서 생각하는 환상이다, 라는 말에는 동감하는데.

사랑도 의지력으로 쌓아가는 것, 우리의 행복을 바라는 것, 내 주위에서 사랑할 것, 이라고 하는 건 사람이 처한 환경에 따라 다를 것 같다.

사막에서 주위에 있는 게 모래와 독충 뿐이면 물 대신 모래 파 먹고 독충을 키울 순 없다. 물을 찾아서 이동해야지. 물 마시지 않으면 죽으니까. 생존은 대부분 행복보다 우선한다.

작중 청년은 '나같은 사람을 누가 좋아해주겠느냐'고 말하는데 그 철학자는 '그것 또한 열등 콤플렉스. 당신이 먼저 신뢰하고 존경하고 좋아하라.' 고 한다.

그럼 주위 사람들 모두가 연애적 의미로 전혀 좋아지지 않으면? 오히려 아주 곤란하고 불쾌한 경우들만 있다면? 그래도 계속 시도하라는 말인가? 아무나와?

'편해지기 위해' 적당한 사람과 그냥 만난 경우라도, '우리의 행복을 위해 의지력으로 노력해서' 사랑할 수 있다고 하는데. 편해지기는커녕 불편해질 사람 아무나와 만나서 친밀하고 사적인 연애관계를 맺으라는 건 자기 착취적이다. 타인만큼 나도 소중하고 무조건 신뢰, 존경해야 할 대상 아닐까.

객관적으로 내 자유와 안전이 존중받지 못할 위험이 있고 주위 모든 사람이 연애적으로 전혀 좋지 않은데도 계속 주위의 아무 사람이나 연애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쌓으려고 해야 하나?


이것 또한 협력을 기대하지 말고 나부터 먼저 사람을 사랑하려고 의지로 노력하면서 몸, 시간, 공간, 재화를 공유? 내 가족들까지 위험에 노출?

이런 것도 아들러 심리학으론 위험을 피하려고만 한다, 거절당했을 때의 상처를 피하기만 해선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려나.

애초에 내가 전혀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만 있으면 그들을 싫어하려는 마음을 멈추려고 노력하며 존중할 수는 있으나 사적인 차원으로 배우자로 맞이해 사랑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아무리 신뢰하려고 노력해도 불쾌함을 느끼는 걸 그 상대가 모를 수가 없고. 그 이상으로 계속 노력하는 건 우롱하는 거나 자기 학대적인 자원봉사 아닌가.

연애적으로 좋아하는 마음 자체는 내 과제인데 그걸 타인이 강요하면 과제의 분리가 이뤄지지 않는 것 아닌가.




인류애와 동지 의식, 시민 연대, 공적 차원에서는 아들러 심리학이 의미 있다고 느꼈는데 성관계, 연애, 개인의 사적 차원에서는 이런 걸 어떻게 더 적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차라리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만나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부부들이나 연애하고 있는 연인의 경우라는 전제가 있으면 또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경우라도 한쪽의 연애적 감정이 식거나 제3자가 좋아지는 경우도 있는데 그럼 아주 복잡해진다.



『미움받을 용기』 전권에선 '이 사람과 있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랑을 실감'하는 것이라고 한다. '상대가 행복하다면 순순히 그 모습을 축복해주는 것', '진정한 사랑이란 열등감, 우월감도 없고', '서로를 대등한 인격체로 대해야' 한다고도 하고.

그렇다면 2권에서 사랑을 주위에서 찾으라는 말은 먼저 다시 한 번 직전 권에서 나왔던 사랑에 대한 전제를 분명히 해둔 채 시작했어야 한다. 그리고 '헤어진다는 선택지가 있고 힘들면 헤어질 수도' 있다는 말도 다시 분명히 하고 이어갔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사랑을 해야 나의 행복, 너의 행복에서 우리의 행복을 바랄 수 있고 그게 공동체, 나아가 인류 전체의 행복을 바라며 공헌감과 행복을 느끼고 자기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며 자기수용할 수 있다고 하는데.

마땅한 사람과 성숙한 사랑을 하려고 쌍방노력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특히 상대적 약자인 사람에게 좀 잔인한 말이 아닐까. 이성애자 여성의 경우엔 남성을 만나다가 임신, 출산할 가능성도 높은데 태어날 1인의 인생은? 자식이야말로 과제 분리가 정말 잘 안 되고 존경하거나 무조건 신뢰하기가 매우 힘든, 한 사람의 타인인데.



나는 사랑에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대상이 꼭 인간일 필요 없고, 연애적 관계가 아닌 경우의 사랑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하다못해 내가 키우는 호접란이 같은 공간에서 생존하도록 키우는 것도 사랑이고 사랑이라서 의미있다.

사람으로부터 사랑받으려고만 하다가 내가 먼저 주위 사람을 (연애적 의미가 아니지만 아끼는 마음으로) 사랑해주고, 동식물을 사랑해주고, 좋아하는 취미 영역과 학문을 사랑하게 되어 참 좋았고 그로부터 나를 쌓아가고 인생을 배워가며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것도 아들러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립인가? 사랑을 내가 먼저 하려고 하며 대상을 신뢰하고 존경하는? 대등한 관계라고 생각하는?




예수도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원칙적으론 그러면 모든 이가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게 돼 세계 평화가 온다.

그런데 예수를 등에 업은 종교 이익집단이 생겨서 정치에도 관여하고 타자화, 배제, 혐오를 일삼고 있다.



대체 어디까지가 내 과제인지. 시민으로서 내 과제가, 내 공헌감이 다른 유권자가 추구하는 이익과 충돌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저 이 2권의 책에서만 읽은 아들러 심리학으로 미루어 짐작해보자면, 공동체와 인류 전체를 위한다는 주관적인 공헌감이 각자 우선하겠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려는 마음을 경계하고 오로지 공동체 전체에 기여하고 대등한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마음이 내 행복이고 우리의 행복이지 않을까.


아들러 심리학에선 계엄 반대 집회와 윤어게인 집회의 충돌 같은 걸 어떻게 설명하고 어떻게 말할지 궁금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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